가축의 삶으로 고찰해본 장수의 욕망
우연히 '최신 도축 기술'이라는 짧은 영상을 보았다. 돼지가 전기 충격에 순식간에 삶을 마감했다. 현재 동물에게 가장 충격이 적은 방법이라고 한다. 고통스럽지 않게 죽이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가축의 고통보다 그 삶의 시간이 나에겐 더 크게 다가온다.
돼지는 보통 태어난 지 여섯 달 쯤에 도축된다. 인간의 시점으로는 사계절도 다 못 보고 끝나는 시간이다. 야생 돼지가 약 4~5년을 생존한다고 하면, 이 여섯 달은 생의 '서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책장을 덮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순 비율로 환산하면 인간의 네 살쯤이기도 하고, 번식 가능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사춘기 무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떤 계산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식이든 삶이 너무 '빨리' 끝난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닭은 더 극적이다. 육계는 알에서 깨어나 60일 이내에 도축된다. 그 사이 닭은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닭은 야생에서 20년도 넘게 생존 가능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60일은 '살았다'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압축된 시간으로 느껴진다.
이를 생각하면 인간으로서 슬퍼지고, 미안해할 수 있다. 인간에게 '오랜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행복한 기억을 향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짧은 삶은 자동으로 안타까움이 된다.
그런데 짧다는 것이 진정 비극일까?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낫다고 말했다. 인간의 정신, 인간의 존엄, 인간의 고통이 돼지의 안락함보다 더 '높다'는 믿음. 나는 이를 뒤집어 본다. 정말로 그럴까. 진정 여섯 달 편안히 살다 끝나는 돼지보다 야생에서 몇 년을 살아도 굶주림과 공포에 노출되는 돼지가 더 나은 삶일까?
우리는 삶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길이로? 고통의 총량으로? 자유로? 혹은 특별한 의미로?
만약 고통이 기준이라면, 사육된 돼지의 삶은 한 가지 측면에서 '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굶주림이 없다. 추위와 폭염이 없다. 포식자가 없다. 피투성이의 싸움도, 치명적인 질병도 덜하다. 인간은 이를 '사육'이라고 부르고, 때로 '복지'라고도 한다. 그리고 도축 방법마저 정말로 공포를 줄여준다면, 적어도 덜 아프게, 덜 무섭게 노력할 수는 있다. 이는 고기를 먹는 우리가 져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통이 줄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고통의 최소화가 전부일까? 덜 아픈 감옥은 여전히 감옥일 수 있다. 동물이 '자유'를 얼마나 인식하고, 자유에 대한 결핍을 얼마나 고통으로 느끼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이를 간과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한 발 더 물러나, 수 십억년 전 시작된 생명의 역사를 떠올린다.
생명은 무엇을 원하는가. 어찌보면 생명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 생명은 '생존'과 '번식'을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축은 기묘한 승리자다. 개체의 운명은 짧을지라도, 종은 번성한다. 유전자는 안정적으로 다음 세대로 흐른다. 야생에서라면 사라졌을 수많은 가능성이, 관리자의 손에서 확률이 된다. 물론 취약한 점도 있다. 다양성이 줄고 한 번의 전염병이 모든 것을 쓸어갈 수도 있다. 관리자가 흔들리면 세계가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나 관리자가 모든 위험을 막아준다는 가정을 놓는다면, DNA의 냉정한 언어로는 '짧지만 성공적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번식이 끝난 생명체에게 장수는 유전자의 목적에서 한참 멀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인간은 번식이 끝나도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은 단지 생물학이 아니라 '서사'에서 온다. 아직 끝내지 못한 문장. 아직 만나지 못한 얼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 인간은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에게 '일찍 끝나는 삶'은 단지 죽음이 아니라, 이야기의 강제 종료다.
흔한 SF적 상상을 해 본다.
인간보다 우월한 외계 종족이 인간을 가축으로 키운다고 하자. 그들은 인간을 완벽하게 키운다. 질병도, 고통도, 굶주림도 없고, 폭력과 위험도 없다. 대신 인간은 열 살 쯤에 사라진다. 도살은 눈 앞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친절하게도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거야'라고 말해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계속 키워진다.
짧지만 풍족한 삶. 우리는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탈출하고 자유를 찾는다. 외계인과 싸워 이길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말이 '옳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고통을 피하려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존재, 끝까지 가보고 싶은 존재, 관계가 끊기지 않길 바라는 존재다. 그러니 우리가 가축을 보며 느끼는 미안함은, 단지 "짧아서"가 아니라 "타인의 목적을 위해 예정된 짧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 쉽고 편한 결론은 없다. 가축들에게 느끼는 미안함을 부정하지 않고, 감사하되 그 감사가 면죄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낭비하지 않기, 고통을 줄이기, 무감각을 지양하기다.
인간이 오래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동물이 오래살고 싶어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간이 오래 살고 싶어하는 감각을 한 번 더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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